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템킨 반란 (문단 편집) == 번외: 열악한 함상 생활 == 포템킨의 반란은 수병에 대한 가혹한 대우가 원인이었는데, 생활수준이 다소 낙후된 러시아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들의 함상 생활이 전체적으로 참담했다. 포템킨의 썩은 고기가 특이한 게 아니고 당시의 저장 기술로는 항해가 오래되면 저장해둔 식재료들이 썩어가 [[곰팡이]]가 생기거나 벌레가 생기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 특성상 항구에 기항하기 전까진 보급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 탓에 바다에서 일하는 것은 기피되는 일이었으며, 당장 조선 수군만 하더라도 칠반천역으로 여겨져 수군 입대를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난중일기]]등의 기록에 남아 있다.[* 정확히는 천민이 아닌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일 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신량역천에 해당된다.] [[특전 U보트]]에서는 식탁에 오르는 고기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잘 묘사되며[* 초반엔 꽤 고급스런 느낌이지만, 나중엔 곰팡이가 슬어있는 빵이 제대로 조리되지도 않고 나온다.], 오래되어 상한 보급품의 썩은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먹는 장면도 나온다. 보급의 난해함과 후달리는 저장 기술이 문제였으므로 전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조차도 [[염장고기]]를 오크통 속에 잔뜩 쌓아놓는 게 현실이었으며, 굶을 수는 없으므로 녹색 곰팡이가 피든 말든 배고프면 꺼내먹어야 했다. [[염장고기]]에 곰팡이가 생기는 건 보존기술의 한계상 [[병조림]]과 [[통조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신선한 야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주식으로 먹던 [[건빵]]의 경우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더럽게 딱딱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영국 해군의 군율에는 '''"식사시간에 전우에게 절대 건빵을 던지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거진 벽돌 취급을 했다. 뿐만 아니라 물조차도 오래되면 썩었기 때문에 항해가 길어지면 물 대신 장기 보존에 유리한 [[럼]]을 마셔댔다. 왜 하필 럼이었냐면, [[설탕]] 산업의 부산물인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가장 저렴한 술이었기 때문. 그래서 상선, 해군[* 해적이 럼을 달고산다는건 잘못된 인식이다. 일반적으로 해적은 물이 상할정도로 오래 항해하지 않았다.] 가릴 것 없이 모든 종류의 선원들은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으며, 채소나 과일을 장기간 먹지 못해 나타나는 비타민 C 결핍으로 [[괴혈병]]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원인과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진 괴혈병이 왜 일어나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대책이 없는 괴혈병은 뱃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위협이었다. 1753년 영국 해군 군의관 제임스 린드(1715 ~ 1794)는 괴혈병을 앓던 수병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끝에 괴혈병이 채소나 과일을 먹으면 낫는다는 걸 입증하며 [[레몬]]을 수병들에게 보급하면 괴혈병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영국 해군성은 레몬이 비싸니 '''수병이 괴혈병으로 죽으면 신병을 뽑아 채워넣으면 그만'''이라 하여 이 해결 방안을 거부하였다. 실로 어이없는 대책이었지만 지금과 달리 린드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레몬이 전량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매우 비싼 고급 음식이었다. 따라서 장기간 항해에 레몬을 지속적으로 배급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회]]를 먹으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았지만 유럽에선 회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괴혈병을 퇴치할 방법을 알았음에도 예산 문제로 괴혈병에 계속 시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나마 린드가 살아있을때 같은 영국인인 [[제임스 쿡]]이 휘하 선원들에게 [[자우어크라우트]]와 과일을 지급해 세계 최초로 괴혈병 없이 세계 일주를 이뤄냈다. 이후에 영국군은 레몬 대신 오렌지를 더 나중에는 라임을 주어 해결했다.] 다만, 20세기까지 이 짓을 한 러시아해군이 낙후된 것은 맞다. 영국해군은 범선시절 말기에 이미 통조림을 개발해 보급해서 구더기와 염장 고기 시절은 졸업했고, 괴혈병도 끝났다. 이렇게 선상 생활이 막장이니 선원들을 모집 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매우 가난한 극빈층, 공짜로 술을 준다는 얘기에 들어온 부랑자들이나 지원했지 대부분은 당연히 기피하였다. 그래서 강제 징병된 사람들은 다들 배를 안 타려고 발버둥을 쳤으며, 모병제를 유지하는 영국 해군에서 조차 사실상 지나가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인원을 채워넣기까지 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술에 취한 수병을 끌고오는것을 보고 생겨난 잘못된 이야기다. 해군 강국인 영국은 되려 타국 해군보다 수병 처우 개선이 늦어서, 전함들조차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공식 수병 거주구역이 따로 없었다. 수병들은 잠을 잘 때면 복도에 해먹을 걸고 올라가 잤는데 이 해먹조차도 부족하여 해먹 1개를 교대로 써가면서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이와 반대로 당시만 해도 장교는 귀족급이라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에 개인 침대와 공간이 허락되었다. 위생도 개판이라 [[함재묘|넘쳐나는 쥐를 때려잡을 고양이]]는 반드시 군함에 태우고 다녔다.[* 이전에 기록돼있던 일본군함은 처우가 좋았다는 말은 오류인데, [[묘코급]]이 관함식 참여차 영국에 갔을 때, 그 배를 둘러본 영국인들은 "일본군함에 비하면 우리 군함은 호텔"이라고 말했다.] 이런 생활로부터 조금 자유로운 함선이 그나마 인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일찍부터 있던 [[미 해군]] 함선 정도였다. 그나마 자유롭다는 [[미 해군]]에서도 여러 크고 작은 일[* 1844년에 사관후보생이 열악한 대우에 불만을 나타내다, 럼에 취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농담을 했는데 이 말이 함장에까지 퍼져 관련된 3명이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처형된 사관후보생은 당시 미 해군 장관의 아들이었는데, 함장은 그 뒤로 보복성 인사조치로 한직으로 쫒겨나 [[제독]]이 되지 못한 채 군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해군장교 후보생들은 현역 해군함에 타서 훈련 및 여러가지를 실습하면서 보조로 배우면서 등용하였는데 이게 어디까지나 함장의 마음대로 이뤄졌기에 이 사건을 계기로 해군사관학교가 생겼으며 해군에 대한 대우 인식이 거론되었다고 한다.]을 겪으면서 차근차근 고쳐나갔다. [[남북전쟁]] 당시 남겨진 기록을 봐도 북군이나 남군이나 해군 환경이 막장이라 백인 흑인 가리지 않고 수병이 되었고 이 열악한 극한환경 속에서 '''백인과 흑인이 차별대우 받지 않고 어울려 지내기도 하였다.'''[* 당시 촬영된 사진을 보면 남군이나 북군 수병들이 흑인 백인 따지지 않고 거리낌없이 어깨동무를 하거나 한 곳에 모여 찍혀 있다. 반면 당시 육군에서는 흑인과 같이 있는 것마저 재수없다고 여겨 사진 하나에 흑인 백인이 같이 나와있는 것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오죽하면 서로 죽어라 싸우던 적국의 해군들이 전투가 끝나면 아군, 적군 관계없이 입수자의 목숨만은 살려주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뱃사람이라는 고된 일을 한다는 동질감 때문이다. 2차 대전 직전, 영국 해군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 중 하나는 영국 해군성이 수병 월급을 대폭 낮추자[* 1차 대전 때 쓴 엄청난 전비부담으로 전후 영국의 국가재정이 악화되었기에 삭감 자체는 수병들도 납득하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10% 삭감이었지만 급여 지급 기준이 같이 바뀌면서 실질적인 삭감폭이 25%로 매우 컸기에 파업이 일어났던 것.] 수병들이 거기에 대한 반대표시로 단체 파업을 일으킨 것이 있는데([[인버고든 항명]]), 하필 대규모 기동훈련이 있는 날이었기에 항구에 정박하는 배들마다 소식이 전해져 파업 규모가 점점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장교들이 슬기롭게 대처한 덕에 파업은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해군성은 곧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이후 주동자 처벌 등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등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한건 아니고 파업을 주도한 수병들을 전역시켰다. 이러한 수병들의 파업은 나름 영국 해군의 전통(?)이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도 이런 대규모 파업이 있었다. 당시에도 영국 해군 수병들은 급여 인상이나 식단 개선 등을 내걸고 파업을 했지만 스스로 규율을 지켜 장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고, 또 전쟁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나타나면 파업을 일시 중단하고 프랑스 함대와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하며 교섭을 벌여 일부 요구조건을 관철시켰고 주동자 처벌도 없었다고 한다. 단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서 벌어진 파업에서는 주동자들이 되도 않은 정치적 요구[* 의회해산이나 프랑스와의 강화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까지 해대다 최후에는 프랑스로의 도주까지 꾀해서 주동자들은 모두 처벌(처형당하거나 [[호주]]로 유형당하는 등...)되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해외에서 작전 중이던 군함의 수병들이 봉급 지급이 행정착오로 제때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항의해 파업을 했고 영국 해군은 주동자 처벌없이 봉급을 지급했으며 수병들도 바로 임무에 복귀한 사례도 있다. 즉, 수병들의 파업을 무조건 항명이나 반란으로 처벌한게 아니라 요구조건을 내부적인 처우개선(봉급 인상 등) 정도로 국한하고 장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엔 해군 고위층과 정부도 일종의 정당한 권리주장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이를 벗어난 무리한 요구나 폭력 등이 수반되면 단호하게 처벌했다. 수병들의 반란조차 해군 특유의 상황 탓이 컸다. 육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주변 부대에서 파악하고 진압하러 오겠지만, 장시간 고립된 상태로 항해하는 경우가 많은 해군의 경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소수의 장교들은 어떻게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배를 점거당하기 쉬웠다. 그래서 가혹한 체벌로 수병들을 억눌러야 했던 것인데, 가혹한 체벌을 가할 수록 수병들의 반발은 더 커질테고, 그러다 한계를 넘으면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강하게 처벌하면 또 해군 조직이 유지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불만에 못 이긴 수병들이 파업이나 반란 등의 형태로 그것을 표현할 경우 장교들에게 해를 끼치고 배를 점거하는 등 도를 넘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수병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가담자를 처벌하지 않고 불문에 붙이는 등 유화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범선]] 시대 영국 해군의 경우 반란을 모의중인 수병들은 밤중에 갑판에서 '''포탄을 굴린다'''는 습관이 있었다(...). 당연히, 진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다는 갑판 밑에 위치한 장교 침실에 포탄 굴리는 소리를 들려주며 '''"우리 지금 화 많이 났다. 뒈지기 싫으면 처우 개선해라."'''고 시위하는 것에 가까웠다. [[해병대]]가 창설된 주 원인 중 하나도 이것이었는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장교들을 보호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수병들을 수감하는 등 일종의 [[군사경찰|헌병]]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해병들을 딱히 우대해 주거나 한 것도 아니고, 되려 19세기 중반 [[세일러복]]이 생기기 전까진 자유롭게 사복 입었던 수병들과 달리 한여름에도 꽉 끼는 [[레드코트]] 입고 각잡고 서있어야 하는 등 개고생을 해야 했던지라, 대우가 거지같으면 해병들이 되려 수병들과 합세해 장교들을 족치는 데 앞장서기도 했으므로 만능 해결책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술했던 인버고든 항명 당시에도 초기에 사태를 해결하려고 해병대를 투입해보기도 했지만 해병들도 수병들이랑 똑같이 임금이 삭감되는 상황이어서 오히려 가담해버렸다. 포템킨 함의 반란에서 특이했던 점은 '''출항 전날 사와서 출항 당일 배식한''' [[임오군란|고기에 구더기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계절이 여름이고 저장기술이 미비하여 식재료가 방치되다시피 해서 맛이 가기 시작해 구더기가 나온 것이다. 물론 신선한 고기도 더운 여름에 그대로 방치하면 미처 썩기 전에 파리가 꼬여서 구더기가 생길 수 있다. 꼭 썩은 고기에만 파리가 꼬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출항 당일에 구더기가 생긴 것은 분명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이 점에서 혹시 처음부터 싱싱한 고기를 사오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군수자금 횡령 등을 의심해야 할 여지가 생긴다. 즉 평소에 쌓인 불만이 누적된 것이 '''출항 당일부터''' 구더기가 생긴 고기가 나오자 터졌을 것이다. 수병 노릇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항해가 길어지면 썩은 고기가 나올 것 정도는 그 동안의 경험으로 당연히 알고 있을 테지만 무려 출항 당일에 벌써부터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가 나오니 열이 받을 수밖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